올해도 독자들의 도파민을 책임질 웹툰과 웹소설 라인업은 빡빡하다. 첫 화를 열 때의 그 짜릿한 뽕맛부터 수개월을 붙들고 있게 만드는 미친 몰입감, 그리고 종국에는 스크린으로까지 뻗어나가는 세계관의 확장을 지켜보자면, 이제 이 바닥은 단순히 이야기를 ‘재밌게 뽑아내는 것’을 넘어 어떻게 독자의 멱살을 잡고 끝까지 끌고 가느냐의 지난한 생존 게임이 된 지 오래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지난 1월 ‘초신작 프로젝트’로 발 빠르게 판을 깔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현임 작가의 신작 무협 ‘광마전기’다. 전작 ‘흑백무제’로 밀리언페이지를 찍고 2022년부터 3년 연속 연간 무협 랭킹 1위를 씹어먹었던 그 짬바가 어디 안 갔다. 환생한 전설의 무림 맹주가 압도적인 무력과 비술로 몰락한 가문을 재건하며 판을 뒤집어엎는 과정이 꽤나 타격감 있게 꽂힌다. 여기에 전생의 기억을 치트키로 써먹는 12살 영애의 짠내 나는 영지 심폐소생술을 다룬 로판 ‘고립된 후작 영애는 먹고살고 싶어서’ 역시 척박한 올리브 평원을 감자밭으로 일구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며 팬들의 입맛을 돋우고 있다. 네이버웹툰 또한 질세라 ‘신작’ 탭을 전면에 내세워 ‘황제는 시녀가 거슬린다’, ‘수사중 연애금지!’ 같은 타이틀로 초반 화제성 몰이에 한창이다.
신작들이 빵 터지는 폭죽이라면, 플랫폼의 든든한 심장은 역시 스테디셀러다. 카카오는 올해도 ‘픽 미 업!’, ‘레드스톰―왕의 귀환’, ‘괴담출근’을 선봉에 세웠다. 헤르모드 작가의 동명 웹소설을 원작으로 와삭바삭 스튜디오와 조우네 작가가 힘을 합친 판타지 웹툰 ‘픽 미 업!’은 극악 난이도의 모바일 가챠 게임 속 던전을 단 한 번의 데스 없이 클리어해야 하는 쫄깃한 전개가 강점이다. 2022년 런칭 이후 작년 내내 판타지 장르 월간 톱10에 알박기를 시전했을 정도니 폼은 입증된 셈이다. 노경찬 작가의 ‘레드스톰’은 ‘아비무쌍’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근본 무협인데, 무려 9년의 연재를 마친 시즌1 이후 약 5년 만에 시즌2로 돌아와 고인물 팬들을 열광케 했다. 사막의 무신으로 각성한 주인공이 세계를 구하려 다시 전장에 뛰어드는 서사가 대규모 전투 씬과 맞물려 미친 밀도를 보여준다. 여기에 작년 한 해를 그야말로 씹어먹은 백덕수 작가의 웹소설 ‘괴담출근’의 질주도 여전할 전망이다. 괴담이 실재하는 세상에서 이를 퇴치하는 회사에 굴러들어 간 주인공의 생존기는 2024년 10월 연재 시작과 동시에 장르 1위를 찍었고, 단 3개월 만에 1억 뷰를 갈아치우더니 12월까지 전 장르 통합 1위라는 기염을 토했다.
이렇게 활자와 스크롤로 탄탄하게 쌓아 올린 IP가 영상화 버프를 받으면 원작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네이버웹툰 ‘현혹’이 올 하반기 디즈니플러스 런칭을 앞두고 다시금 차트 역주행을 하는 게 딱 그런 케이스다. 1935년 경성을 배경으로 가난한 화가 윤이호와 신비한 여인 송정화가 얽히는 이 미스터리 스릴러는, 일제강점기라는 눅눅한 시대상에 뱀파이어라는 서구적 소재를 기가 막히게 비벼내며 2019년부터 이듬해까지 총 60화 연재 내내 평점 9.9를 유지했던 명작이다. ‘머니게임’과 ‘파이게임’을 엮어 넷플릭스 ‘더 에이트 쇼’를 뽑아냈던 한재림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수지와 김선호가 주연으로 붙었다니 기대치가 폭발하는 건 당연하다. 신민아, 주지훈, 이종석, 이세영이라는 미친 라인업을 꾸린 디즈니플러스의 ‘재혼 황후’나 티빙의 ‘취사병 전설이 되다’, 넷플릭스 ‘사냥개들’ 시즌2 등 올해 쏟아질 영상화 리스트만 봐도 텍스트 서사의 확장은 이미 새로운 궤도에 올랐다.
흥미로운 건 이렇게 잘 만들어진 세계관이 오리지널 매체를 넘어 끊임없이 변주되는 현상이 비단 한국 웹툰 시장만의 문법은 아니라는 점이다. 스크린에서 대박을 친 IP가 역으로 코믹스나 활자의 형태로 팬들을 다시 불러모으는 글로벌 서브컬처 씬의 흐름을 보면 결국 본질은 하나로 통한다.
원작 게임의 처참했던 초기 평가를 멱살 잡고 끌어올리며 2023년 크런치롤 애니메이션 어워드 올해의 애니상까지 거머쥐었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를 보자. 그 끈적하고 먹먹한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마다 나는 보통 세 가지 행동 중 하나를 택하곤 했다. 애니를 정주행하거나, 게임을 다시 켜서 나이트 시티를 쏘다니거나, 아니면 라파우 야키의 스핀오프 망가 ‘노 네임’을 들춰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식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넷플릭스 시즌2를 기다리는 동안 내 무료함을 달래줄 완벽한 장난감이 하나 더 생겼다. 다크 호스 코믹스에서 내놓은 프리퀄 망가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매드니스’다.
CD 프로젝트 레드의 바르토시 슈티보르가 스토리를 쓰고 트리거 스튜디오의 ‘BNA’를 작업했던 아사노가 작화를 맡은 이 작품은, 프리퀄의 정석대로 우리가 데이비드 마르티네즈를 만나기 전 시점으로 시계를 되감는다. 포커스는 엣지러너 크루의 공식 금쪽이인 레베카와 그녀의 오빠 필라에게 맞춰져 있다. 이 남매가 데이비드를 만나기 전엔 대체 뭘 하고 살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차 앞뒷좌석에 구겨져 잠을 청하던 쌩 양아치 빈대들이었다. 아버지가 나이트 시티의 전설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네포 베이비 혜택 하나 누리지 못한 채 찌질하게 살아가는 남매의 짠내 나는 현실은 이 도시 특유의 시궁창 같은 매력을 오히려 배가시킨다. 결국 이 암울한 도시의 늪에 등 떠밀리듯, 두 사람은 엣지러너로 크게 한탕 해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밑바닥부터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셰인 블랙 감독의 ‘키스 키스 뱅뱅’을 연상케 하는 이들의 엉망진창 삽질기는 나이트 시티의 온갖 잡범들과 쪼렙 용병들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며 환장할 코미디로 흘러간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 첫 장을 넘기기 전엔 조금 쫄아있었다.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처럼 그냥 팬서비스용 의상 입혀주기나 시전하는 흔해 빠진 추억팔이 프리퀄이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권은 내 우려를 기분 좋게 박살 냈다. 애니메이션의 충실한 DLC 확장팩처럼 찰지게 읽히면서도 묘하게 뻗어나가는 독자적인 곁가지 서사가 너무 훌륭해서 당장 다음 권이 마려울 정도다. 물론 원작 팬들을 긁어줄 만한 이스터에그가 한 트럭 쏟아지지만, 그게 결코 독자를 호구로 아는 얄팍한 상술이나 억지 헌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방대한 사이버펑크 유니버스를 망가라는 포맷 안에 너무도 위화감 없이 이식해 냈다.
광마의 서사가 텍스트를 뚫고 나와 독자를 베고, 경성의 뱀파이어가 스크린으로 옮겨가며, 나이트 시티의 금쪽이들이 다시 흑백의 펜선 위에서 뛰논다. 결국 한국의 웹툰이든 글로벌 메가 히트 애니메이션이든,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매력적인 유니버스에는 아직 파헤칠 이야기가 썩어넘친다는 사실을 2026년의 콘텐츠 씬이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