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판에는 이른바 ‘정해진 흥행 공식’이 통하지 않는다. 수백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들도 관객들의 외면을 받기 일쑤인 가운데, 전혀 다른 방식과 규모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두 작품이 시선을 끈다. 극장가에서 순항 중인 연상호 감독의 초저예산 영화 ‘얼굴’과 넷플릭스 비영어권 부문 글로벌 정상을 차지한 인도 영화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의 괄목할 만한 성과가 바로 그것이다.
초저예산으로 일궈낸 값진 성과, 영화 ‘얼굴’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얼굴’은 순제작비 2억 원대라는 꼬리표가 무색하게 개봉 후 불과 닷새 만에 35만 7천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지난 15일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연상호 감독은 지분만 받고 ‘노 개런티’로 기꺼이 합류해 준 배우 및 스태프들과 수익을 나눌 수 있게 되어 무척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또한 예상보다 훨씬 뜨거운 반응을 보며 대중의 취향을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받다가 노년에 이르러서야 전각 명인으로 인정받은 임영규(권해효 분)와 그의 아들 임동환(박정민 분)의 서사를 다룬다. 동환이 어릴 적 세상을 떠난 어머니 정영희(신현빈 분)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면서 비극적인 가족사가 한꺼풀씩 벗겨지는데, 인간의 비틀린 내면을 날카롭게 응시한다는 점에서 연 감독의 초기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유튜브에서 얻은 자극과 13회차 촬영의 기적 처음부터 초심을 찾겠다며 저예산 작업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대본의 완성도에 만족해 투자를 유치하려 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했고, 영상화를 반쯤 포기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러던 중 초등학생 딸과 함께 유튜브를 시청하다가 적은 자본으로도 훌륭한 콘텐츠가 쏟아지는 현실에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 “당신 돈으로 직접 만들어보라”는 아내의 명쾌한 조언이 기폭제가 되어 지난해 초 본격적인 닻을 올렸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 특성상 제작비 부담이 컸음에도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에서 영감을 얻어 좁은 골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공장 내부, 임영규의 방, 사장 백주상(임성재 분)의 사무실 등 4개의 주요 공간을 한 세트장에 오밀조밀하게 배치하는 선택과 집중을 발휘했다. 스태프들의 생업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현장 인력을 최소화하고 전체 촬영을 단 13회차 만에 마무리 지었다. 거의 모든 씬을 한두 번의 테이크로 끝내야 하는 극한의 환경이었으나 업계 최고들이 모인 덕분에 가능했던 결과물이다. 플러스엠이라는 대기업 배급사가 선뜻 나섰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독립영화와 결을 완전히 같이 할 수는 없겠으나, 100억 원대 제작비가 우습게 여겨지는 현 영화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경을 뛰어넘은 ‘메이드 인 코리아’의 글로벌 신드롬 한국 극장가에서 작지만 강한 영화가 선전하고 있다면,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는 한국 문화를 소재로 한 타밀어 크로스오버 영화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2026년 3월 12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식 공개된 라 카르틱 감독의 ‘메이드 인 코리아’는 무려 6,700만 회 이상의 조회수와 1,270만 시청 시간을 기록했다. 이는 각각 3,300만 회와 2,300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한 ‘보더 2(Border 2)’와 ‘두란다르(Dhurandhar)’를 2, 3위로 밀어내며 3월 셋째 주 넷플릭스 비영어권 영화 부문 글로벌 1위에 등극한 수치다. 3월 한 달 동안 2주 연속 1위라는 대기록이다. 인도 영화들이 차트 상위권을 장식한 가운데, 남인도 영화가 글로벌 톱 10 차트 정상을 차지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라 현지 팬들과 배우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라 카르틱 감독 역시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토록 엄청난 글로벌 규모의 성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벅찬 감격을 표했다.
타밀 시골 소녀의 낯선 한국 적응기 프리양카 모한, 백시훈, 박혜진이 호흡을 맞춘 이 작품은 타밀나두주 시골 마을에 살며 한국 문화에 푹 빠져 지내던 소녀 센바감(Shenbagam)의 궤적을 좇는다.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겪으며 홀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그녀는 자신의 뿌리인 타밀 문화를 온전히 간직한 채 낯선 이국 땅에서 새로운 인연을 맺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간다.
문화적 배경도 제작 규모도 판이하게 다른 두 작품의 선전은 결국 창작의 본질을 묻는다. 연상호 감독은 “예전에는 암묵적인 기획 매뉴얼이 존재했지만 최근 급변하는 영화판에는 더 이상 어떤 규칙도 통용되지 않는다”며 다채롭고 파격적인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수백억짜리 공식에 의존하지 않은 2억 원대 한국 영화의 묵직한 돌직구와, 타밀 문화의 렌즈로 한국을 바라본 인도 영화의 전 세계적인 약진은 길을 잃은 현대 영상 산업이 나아가야 할 가장 선명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